티스토리 뷰

목차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이정천, 이범석, 김좌진장군, 이회영선생, 방승환 참령의 흉상의 육사 내 적절한 곳으로 이전을 하고

    홍범도 장군 흉상이 외부로 이전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알아보겠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어떤 인물인가

    홍범도 장군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1868년 3월 19일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습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만두고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 10월 1일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국을 격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또한 1920년 10월 25일 청산리 전투에서도 일본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43년 8월 19일 카자흐스탄에서 향년 75세로 사망했습니다. 유해는 2021년 8월 15일 한국으로 봉환되어 국립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한국 독립운동의 선봉장으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이를 통해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히고 한국독립의 희망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홍범도 장군 흉상이 육사에 설치된 이유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군사화학교에 설치된 시기는 2018년입니다. 2018년 3월 1일 , 육군사관학교가 삼일절 99주년을 기념하여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5인의 독립군, 광복군 흉상을 교내에 설치했습니다.

     

    이 흉상은 육사 교내에 설치된 최초의 독립군, 광복군 흉상입니다. 육사 측은 홍범도장군을 비롯한 독립군, 광복군 공훈을 기리고, 이를 통해육사 생도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함양하고자 흉상을 설치했다고 밝혔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수여

    건국훈장은 건국의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기를 공고히 함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입니다.

    1962년 7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전기를 마련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을 수여한다고 밝혔습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자유시 참변

    자유시 사변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 한인 독립군단이 러시아 적군에 의해 무장해제 되고 포로가 된 사건입니다

     

    1921년 초, 러시아 극동 공화국 내의 한인 독립군단들은 통합을 위해 자유시에 집결했습니다. 이들은 대한독립군단, 국민회군, 사할린의용군등 다양한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강대국 러시아가 독립군을 지원해 준다면 일제를 상대하기 더 쉽고,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하나로 모이면 더 큰힘을 발휘할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 독립군단은 정치적 성향, 군사적 지취체계, 소련 정부의 지원여부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갈등을 빚었습니다. 특히, 대한독립군단과 국민회군은 서로를 적대시하는 관계였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러시아 적군(혁명군)의 개입을 불러왔습니다. 러시아 적군은 자유시의 한인 독립군단을 무장해제하고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독립군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과 관련하여 국방부는 홍 장군이 1921년 6월 러시아 공산당 극동공산당 군대가 자유시에 있는 독립군을 사살한 일과 홍 장군이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였고  또, 육사의 전통과 정체성, 사관생교육을 고려할 때 소련 공산당 가입  및 활동이력등 논란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에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논란이 있어 이전이 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자유시 참변과 역사외곡

    이 사건 뒤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욕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케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이 있었습니다.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수가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각에서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참변과 관련해 '홍범도가 자유시참변에 가담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

    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고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에서 한 것이 없습니다.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며 이 시기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가 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군대는 무장해제를 한 상태였기에 사상자가 없었습니다. 홍범도장군은 자유시 참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장교들과 솥밭에서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여야의 반응과 국방

    국민의 힘은 찬성을 하고는 있는 것으로 보이나 내부에서는 '과유불급이 아닌가', '홍장군 동상은 그대로 놔두고 정율성 역사공원은 폐지하는 쪽으로 사회적 합의와 타협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더불어 민주당은 '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역사, 반민족적 폭거'라며 맹공했습니다. '국군의 근간이 되는 육사는 군군의 뿌리인 독립군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정체성'이라며 정권차지의 독립운동사 부정과 친일 행적 지우기 시도라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국방부는 북한 김일성이 소련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불법 남침해 6.25 전쟁을 자행한 점을 고려할 때 소련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등 논란이 있는 홍장군의 흉상이 사관도 교육의 상징적 건물인 충무관 중앙현관에 있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공식입장입니다.